조두순이 벌벌 떨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업적

죽기 직전까지 고문받았던 조두순
5공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생한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풀리지 않는다고 밝혀

우리에게 제5공화국, 1212사태, 518민주화운동, ’29만원 밖에 없다’ 등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갖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대한민국 제11﹒12 대통령 전두환을 의미하는 키워드입니다.

그동안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존경 받는 인물 보다는 질타 받는 인물로 유명하지만 그가 의외로 두려워 했던 존재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범죄자들인데요.

왜 범죄자들이 두려워할까요?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83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19세 여성이 길가던 도중 한 괴한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는데요. 이 괴환은 성폭행한 죄로 3년형에 수감을 하게 됩니다. 피해자 가족은 3년형이 부족하다며,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청원을 보냈는데요.

청원 내용을 인지한 전 대통령은 만기 출소한 그를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고, 죽다 살았을 정도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 주인공은 나영이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조두순입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는 95년 12월 21일 술자리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려 숨지게 했는데요.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은 그저 나영이 사건으로만 치부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두순을 비롯해 많은 범죄자들은 전두환 정권아래 운영 되었던 삼청교육대에서 범죄자란 범죄자는 죄다 죽도록 두들겨패고, 가해자 인권은 무시할 정도로 강력 범죄자를 때려잡는데 가차없이 발휘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 분위기입니다.

또한 아동납치율이 급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이윤상 사건입니다. 실제 “꼬리에 꼬리에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방송프로그램에서는 2022년 1월 20일 방영된 이윤상 유괴 사건에 대해 조명된 바 있습니다.

3세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했던 14살 이윤상군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로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성적을 거두었을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였는데요.

1980년 11월 13일 학교 선생님이 상담을 하러 간다며 집을 나선 이윤상군은 늦은시간까지에도 귀가하지 않고, 그날 밤 이윤상군 집으로 낯선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우리는 전과자들이다 밀항자금이 필요하니 자식이 죽길 원하지 않는다면 현금 4천만원을 준비해라”와 같이 생각지도 못한 청천 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 이윤상군 부모는 경찰에 유괴사실을 알렸고, 경찰은 자택 집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 전화를 감청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3분 이상 통화하지 않으면 상대방 위치 파악이 힘들었는데요.

이후 범인은 여러차례 협박전화를 시도, 약속장소를 무려 27차례나 바꿔가며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바 있습니다. 유괴 기간이 오래되고, 부모 요청이 있어 경찰은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했는데요.

이 소식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귀까지 들어가게 돼면서 격분하게 됩니다. 긴급 대국민 담화를 열어 범인에게 선전포고를 했는데요.

대국민 담화를 마치며 유괴범에게 본인이 전할 말이 있다며, “3월 3일까지 자수하면 관용을 베풀겠다.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죽는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서민을 괴롭히는 자는 내가 책임지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강력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은 일선 경찰서에 방문하고, 이윤상군의 부모집에 찾아가 인삼 두뿌리와 함께 거액을 주며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전두환 대통령의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서 이야기 했지만 이를 거절한 범인에 격분하며, 전 경찰력을 총 동원해 반드시 범인을 검거해 사형시킬 것을 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보안사령부 개입도 있었고, 외국의 프로파일러를 동원한 최면수사까지 진행했지만 영구 미제로 끝날뻔 한 사건은 결국 1981년 11월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범인의 정체가 알려지자 전국민은 충격에 휩싸였는데요. 그는 바로 이윤상군의 체육교사인 주영형입니다. 수사 초기부터 그는 부모들이 의심하는 면식범 명단에 빠졌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훤칠한 외모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영형은 이윤상군의 죽음에 대해 진술하는 과정에서 실종 당일, 아이의 입을 막고 이불로 덮어놨는데, 다음날 확인하니 질식해 죽어있었다는 일종의 사형을 면하기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부검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영형의 범행이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 증명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형이 내려지지 않을 수도 있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었는데요.

그 때 등장한 전두환 대통령은 아동 납치 자체에 가중법을 적용시켰고, 주영형은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에 억울하다며 항소를 제기 한 주영형.

전두환 대통령에게 자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증명하듯, 줄곧 항소를 제기했던 주영형 사건은 2심, 3심에도 전부 사형 선고가 판결되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보통 1년 정도 사형수들을 살려주는 관례가 있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최대한 빨리 사형이 집행되도록 지시를 했으며, 판결 열흘만에 주영형은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후 주영형의 장기는 사회에 기증됬고, 주영형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던 두 여제자는 큰 혐의가 없었지만 협박편지, 전화 등 범인에게 이용된 것을 참작해 각각 징역 2년과 3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건 종결 후 이윤상군의 누나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반드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며 편지를 보냈는데요.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전두환 대통령은 이윤상군의 누나가 대학에 진학하자 사비로 4년간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줬다고 합니다.